영화는 말한다

[영화] 트루먼 쇼 (1998)_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영화는설왕은 2022. 9. 9. 10:08

 

* 기억에 남는 한 장면

 

"트루먼 쇼"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트루먼이 아침에 문 밖에 나와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 장면입니다. 트루먼은 이렇게 인사하죠. "좋은 오후, 좋은 저녁, 좋은 밤 보내세요." 이렇게 인사를 하고 짐 캐리 특유의 과장된 몸짓과 표정으로 크게 웃습니다. 이 장면은 처음 볼 때부터 인상에 깊이 남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식으로 인사를 하는 사람은 없거든요.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서 인사를 할 뿐이죠. 아침에 만났으면 Good morning, 점심에 만났으면 Good afternoon, 저녁에 만났으면 Good evening으로 인사를 합니다. 영어 시간에도 이렇게 배우고 실제로 미국에서도 사람들은 그렇게 인사를 합니다. 아침, 오후, 저녁, 밤 인사를 한꺼번에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트루먼의 인사법이 특이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단지 그렇게 한 번만 인사하고 지나갔으면 이 장면이 기억에 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다시 보니 트루먼이 시헤이븐 섬이라는 거대한 세트장을 벗어나는 문 앞에서 다시 한번 이 인사를 하더군요. 잊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보니 '아, 그래서 내가 트루먼의 인사를 계속 기억하고 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죠. 그리고 다시 생각했습니다. '이거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구나. 메시지다'라고 말이죠. 

 

 

* 왜 트루먼인가?

 

트루먼은 거대한 세트 안에서 살아갑니다. TV 프로그램 쇼의 PD인 크리스토프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그 프로젝트는 한 사람의 삶을 여과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삶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카메라만 있으면 안 됩니다. 또 중요한 요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것이죠. 카메라를 의식하고 그 카메라를 통해서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당연히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하거나 사회 윤리나 도덕적 통념에 따른 행동을 보여 주는 것과 같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 생각을 고려하는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을 몰라야만, 타인이 원하는 행동이 아닌 인간 본연의 진짜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전제 위에서 트루먼 쇼는 계획된 것입니다. 그래서 쇼 이름도, 그리고 주인공 이름도 진짜 사람 (truman/trueman)입니다. 그래서 크리스토프는 시헤이븐이라는 섬을 둘러싸는 거대한 세트를 만들고 거기에 배우들을 투입합니다. 트루먼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배우이고 트루먼이 이 TV 쇼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트루먼만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모르죠. 한 사람의 삶을 날 것 그대로 보기 위해서 거대한 무대와 수많은 조연 배우와 제작자들이 투입된 것입니다. 거대한 몰래카메라입니다. 트루먼이 태어날 때부터 모든 순간이 카메라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죠. 트루먼을 제외한 모든 사람과 주변 환경이 통제되고 있었습니다. 

 

 

* 탈출과 환호

 

트루먼 쇼의 줄거리는 자신이 주인공인지 모르는 어느 리얼 버라이어티 쇼의 주인공이 세트장을 탈출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가두어놓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니까 관객들은 아마 대부분이 트루먼의 탈출에 박수를 보냈을 것 같습니다. 영화 속에서 트루먼 쇼를 보고 있던 사람들도 트루먼이 탈출하자 환호하면서 박수를 보냅니다. 자신들이 즐기고 있던 프로그램이 끝나게 된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보이지 않습니다. 탈출이 주는 희열이 있습니다. 수많은 카메라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다는 사실을 견디기 어려울 것 같다는 짐작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카메라 바깥으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죠. 크리스토프는 트루먼의 모습은 연출이 없는 100% 진짜 사람의 모습이라고 주장하지만 관객들은 그의 주장에 쉽게 동조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을 가두어놓고 주변에 모든 사람들이 '연기'를 하고 있는데 그 사람의 모습을 진짜 사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지 갸우뚱하게 되는 것이죠. 사람이라면 속박을 참지 못하고 자유를 찾아서 탈출하는 것이 진짜 사람의 모습이기도 하죠.

 

 

* 피터 위어 감독 또는 앤드류 니콜 작가가 주는 메시지

 

트루먼이 아침, 오후, 저녁, 밤 인사를 한꺼번에 하는 이유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리' 인사를 해두는 것이죠. 아마도 트루먼 쇼의 시청자들은 트루먼의 인사가 웃겼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트루먼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있고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정해진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트루먼이 점심에 무엇을 할지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 그리고 밤에 몇 시에 집에 들어갈지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트루먼의 삶은 통제되고 있고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거의 그 예측대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는 트루먼은 삶은 불확실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인사를 하죠. 어쩌면 그의 삶이 다른 보통 사람들의 삶보다 그 스스로에게는 훨씬 더 예측 불가능했을 것도 같습니다. 아무래도 TV쇼이니까 극적인 요소를 중간중간 넣어야 했을 테니까요. 어쩌면 삶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하루에 나누어서 해야 할 인사를 한꺼번에 하는 것도 트루먼 쇼의 영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트루먼의 인사를 통해서 감독 또는 시나리오 작가가 주는 메시지는 "당신의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죠. 우리는 우리의 삶을 대충 예측할 수 있습니다. 점심에 무엇을 할지, 저녁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대충 예상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삶이 뭐 그리 다르게 펼쳐지겠습니까. 그냥 같은 일상의 반복이죠. 트루먼은 이 생각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트루먼의 인사는 저에게는 이런 의미로 들렸습니다.

 

"너의 주변 사람과 환경을 모조리 통제한다고 할지라도 너의 미래는 열려 있고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 탈출도 기획된 것이 아니었을까?

 

트루먼이 갑갑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트루먼이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주인공인 세상을 떠나 수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인 세상으로 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만약 그 상황을 알게 되었다면 적절하게 그 상황을 이용할 방법도 생각해봤을 것 같습니다. 사실 문제는 트루먼의 첫사랑인 실비아였죠. 트루먼은 자신이 사랑한 사람이 아니라 사랑해야 하는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트루먼의 결혼 상대도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죠. 만약 트루먼이 실비아와 결혼을 했다면 바깥세상에 대해서 그다지 궁금해하지도 않았을 것 같고 탈출을 감행하지도 않았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트루먼의 탈출도 트루먼 쇼에서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크리스토프는 어느 시점에서 프로그램을 끝내고 싶었을 것이고 그 결말로 트루먼의 탈출만 한 것이 있었을까요? 트루먼이 시헤이븐 세트 출구 앞에 서 있을 때 크리스토프는 트루먼을 설득합니다.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죠. 

 

"너는 이 세상의 주인공이야. 여기를 벗어나는 것은 두려운 일이야.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너를 사랑하고 있어. 그러니 여기에 남아, 나와 함께."

 

아마 이 말에 트루먼이 살짝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트루먼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가짜고 카메라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이 리얼 버라이어티 쇼는 더 이상 가치를 가질 수 없습니다. 여기서 트루먼은 떠나야 합니다. 트루먼이 머뭇거리자 크리스토프는 욕을 하면서 트루먼을 다그칩니다. 뭐라고 말을 하라고 밀어부치죠. 그러자 트루먼이 이 대사를 칩니다. 

 

"In case I don't see ya, good afternoon, good evening, and good night."

 

이 정도면 크리스토프가 일부러 밀어낸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죠. 

 

 

 

* 신은 졌고, 인간이 이겼다?

 

크리스토프는 트루먼을 가두려고 했던 것처럼 보이고 트루먼은 온갖 난관에도 불구하고 결국 탈출에 성공합니다. 두 사람의 대결에서 마치 트루먼이 이긴 것처럼 보입니다. 트루먼 자신을 제외한 모든 상황을 지배하는 크리스토프는 마치 신과 같다는 느낌을 줍니다. 마지막에 시헤이븐 세트장을 탈출하는 트루먼의 모습도 마치 신이 만든 세상을 탈출하는 인간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사실 이는 의도된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볼 때, 크리스토프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나 트루먼 쇼의 영화감독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이죠. 미래의 세상이 과거의 역사의 반복이고 나의 내일이 어제의 반복이라면 세상은 얼마나 재미없고 따분한 곳입니까? 트루먼 쇼에 당대에 제일 잘 나갔던 코미디언 배우인 짐 캐리를 캐스팅한 것은 그래서 트루먼이 유쾌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캐스팅 자체만으로도 알 수 있었는데, 트루먼 쇼에서 짐 캐리가 주었던 암시는 바로 그런 것이죠.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하루하루가 재밌지 않니?" 오늘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내일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겁니다. 영원히 시헤이븐에 갇혀 살 것 같았던 트루먼이 탈출했던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결국 트루먼이 이기고 크리스토프가 진 것일까요? 달리 말하면 인간이 이기고 신이 진 것일까요?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에 나온 문장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처럼 트루먼을 키운 것은 팔 할이 크리스토프였습니다. 트루먼이 크리스토프를 이겼다면 그것은 트루먼을 키운 크리스토프의 공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토프가 트루먼이라는 캐릭터를 아주 잘 키운 것이죠. 트루먼의 행동이 박수를 받을 만한 행동이었다면 그 박수의 절반은 크리스토프가 받아야 합니다. 제가 볼 때 크리스토프는 결국 트루먼을 자신이 만든 세상 바깥으로 내보내는 데 성공합니다. 그것도 자신의 의지로 말이죠. 

 

 

* 마지막으로 

 

어느 때부터인가 할리우드 영화는 상상력이 다 떨어져 버린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예전 이야기를 계속 우려먹고 있는데 처음에는 재미있었지만 이제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 한심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1998년에 나온 "트루먼 쇼"의 상상력은 매우 기발했습니다. 이런 영화가 많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 영화가 주는 한 문장

 

"설레지 않냐? 산다는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