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말한다

[영화] 명량(2014)_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할까?

영화는설왕은 2023. 2. 7. 09:00

2023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영화관객수 1위의 영화 "명량". 1700만 명의 관객이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우리나라 인구가 감소하고 있는 추세이고 다양한 콘텐츠가 나왔다가 금방 사라지는 현 상황으로 볼 때 명량이 10년을 지켜온 1위의 자리는 앞으로도 꽤 깨지기 어려울 것 같다. 오늘이 2023년 2월 5일인데 "아바타:물의 길"이 생각난다. 이 영화가 지금 롱런 중인데 "명량"의 기록을 깰 수 있을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명량"이 1위의 자리를 내어준다고 해도 10년 간 1위 자리를 지킨 것만 해도 대단하다. 

 

* "명량"에서 다루는 내용

영화 "명량"은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일본이 우리나라를 다시 쳐들어왔을 때 울돌목에서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를 가지고 300척이 넘는 일본 수군을 무찌른 명량대첩 사건을 다루고 있다. 

 

- 이 부분에서는 다양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2척이라는 말도 있고 13척이라는 말도 있고, 왜군의 배도 300척이라는 기록도 있고 133척이라는 기록도 있다. 유성룡이 쓴 징비록에 따르면 이순신의 조선 수군의 배는 12척이었고 일본군의 배는 300여 척이라고 나온다. (징비록, 알마출판사 2015, 172-173)

 

* 나는 이 영화를 왜 보았을까?

사람들은 왜 명량을 보았을까? 이 뻔한 이야기를 왜 보았을까? 역사를 뒤집는 내용도 아니고 역사에 기반한 영화이다. 누가 감히 이순신 장군의 위대한 전투를 삐딱한 시선으로 보며 새로운 해석을 시도할 수 있을까? 적어도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뻔한 스토리 전개가 불 보듯 뻔했다. 이미 내용을 다 알고 있는데 왜 보았을까? 거북선을 보려고? 거북선이 임진왜란 당시에는 괴물 같은 전함이었을지 모르나 지금 우리는 외계인이 타고 오는 우주선도 만들어 낸다. 어마어마한 전투 능력을 가진 현대의 전쟁 무기들과 거북선은 비교할 바가 아니다. 나는 이 영화를 왜 보았을까? 내가 이 영화를 본 이유는 간단하다. 남들이 다 봤으니까. 사람들이 왜 보는지 궁금해서 봤다.

 

 

* 추천하나?

이미 본 사람에게도 추천하고 안 본 사람에게도 추천한다. 본 적이 없다면 이순신의 명량 해전을 영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울돌목의 바닷소리가 웅장하고도 무서운데 만약에 극장에서 볼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다. 나처럼 전쟁 장면을 끔찍해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더 몰입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번 본 사람에게도 다시 볼 것을 추천한다. 나는 "명량"을 2014년 개봉할 당시에 한 번 보았고 2023년에 다시 한번 보았다. 2014년에 볼 때보다 2023년에 볼 때 더 좋았다. 어차피 스토리는 뻔한 것이었으니까 2014년에 본 것이나 2023년에 본 것이나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다시 보니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 무엇이 좋았나?

2023년에 보았을 때 더 좋았던 이유는 영화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14년에 볼 때는 이순신과 등장 인물들, 전쟁의 참혹함, 거북선의 모습에 나의 시선과 생각이 분산되었던 것 같다. 특별히 나의 신경을 건드렸던 부분은 전쟁의 참혹함이었다. 평소에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장면들이 전쟁에서는 연출된다. 사람의 목이 잘려 나가고 코와 귀가 베이고 탈영하는 군인을 처형하는 장면이 주는 잔인성 때문에 거부감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이상한 것 아닐까?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면 그렇게 할 것 같기는 하지만 그냥 전쟁이니까 그럴 수 있지 하고 받아들이기에는 나는 전쟁 영화에 익숙하지 않다. 두 번째 볼 때 좋았던 것은 그런 잔인한 장면들을 이미 한 번 보았기 때문에 그 장면이 주는 충격을 줄일 수 있었다. 그래서 영화가 가지고 있는 커다란 맥을 좀 더 집중해서 볼 수 있었다. 사실 전쟁의 참혹함과 잔인성을 보여 주는 장면은 그저 배경에 불과하다. 전쟁 중이라는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 그래서 "명량"의 주제는 무엇일까?

내가 봤을 때, "명량"이 내세우는 주제는 두려움이다.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할 것인가? 사람들은 오랜 전쟁으로 인해 삶이 피폐해졌다. 그리고 바로 얼마 전에 원균이 전투에서 대패했기 때문에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조선 수군의 상황으로 보나 일본군의 규모로 보나 명량해전은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고작 12척의 배로 어떻게 300여 척의 일본 수군에 맞설 수 있을까? 이순신 장군이 아무리 뛰어난 명장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전투는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사람들은 아마 이순신 장군이 미쳤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임금에서 충성을 다해서 전투사령관의 역할을 했는데 임금은 그를 믿지 못하고 그를 파직하고 고문하고 옥에 가두었다. 이순신을 다시 복직시킨 이유는 이순신 밖에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서였지, 그를 다시 믿어서가 아니었다. 어쩌면 이순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그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앉혔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바보도 아닌데 이런 상황을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순신과 함께 전투에서 이긴들 그들에게 공이 돌아오지도 않고 이순신을 따른다는 것이 출세를 보장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할 것인지 다루고 있다. 그것이 문제였다. 거북선이 불에 타자 이순신의 아들 이회가 아버지에게 묻는다. 왜군을 무찌를 복안이 있는지 말이다. 이순신은 거북선은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문제는 독버섯처럼 펴져 버린 두려움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전투는 두려움을 이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승산이 있다고 말이다. 나는 명량을 다시 보면서 왜군과 싸우는 이순신이 아니라 두려움과 싸우는 이순신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는 명량해전에서 승리를 거둔다. 그것은 왜군을 무찌른 것이기도 했지만 두려움을 무찌른 것이기도 했다. 극단의 두려움을 어떻게 용기로 바꿀 수 있습니까? 이회가 충무공에게 묻는다. 그러자 이순신이 이렇게 대답한다. 

 

"죽어야겠지. 내가"

 

* 이순신은 두렵지 않았을까?

이순신은 두렵지 않았을까? 그는 워낙 훌륭한 사람이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을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이순신은 죽음을 두려워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타인의 생명도 지키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삶이나 죽음이나 매한가지라고 생각한다면 아등바등 삶을 연장하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다. 오히려 죽으면 더 편해질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순신은 죽음을 두려워했고 삶을 사랑했다. 실제도 그랬을 것 같고 영화에서도 충분히 그런 면모를 잘 살렸다. 명량해전이 끝난 후에 소년 수봉(박보검)이 이순신에게 토란을 바치는 장면이 나온다. 전쟁이 끝난 후에 허기를 달래고 기력을 보충하기 위해 음식을 먹는데, 이때 소년 수봉이 이순신을 챙긴다. 이순신은 토란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토란이 아니냐?"

토란을 하나 집어 들어서 먹은 후에 다시 이렇게 말한다. 

"먹을 수 있어서 좋구나."

 

맛이 있고 없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순신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죽지 않고 살아서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다고 고백한다. 어찌 그라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겠는가. 그는 죽음을 두려워했고, 그래서 살려고 발버둥 쳤고 그가 죽음을 두려워한 만큼 백성들이 느끼는 죽음의 두려움도 공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있는 힘을 다해서 백성들의 생명을 지키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 두려움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다

이순신은 두려움으로 두려움을 극복했다. 이순신은 울돌목에서 들리는 회오리치는 파도의 소리를 일본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자신의 부하들이 내는 곡소리로 듣는다. 이회가 아버지에게 왜 싸우느냐고 묻자 이순신은 '충'이라고 대답한다. '충'은 임금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지키는 의리라고 설명한다. <명량>에서 이순신이 제일 두려워한 것은 사람들을 잃는 것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는 것을 제일로 두려워했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자. 죽음은 두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의 죽음이 가장 두려운가? 나의 죽음이 아니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누군가의 죽음이? 만약에 타인의 죽음이 더 두렵다면 내 목숨을 다해서 타인의 목숨을 지킬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나의 죽음보다 그 누군가의 죽음이 더 두렵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방법일 수 있다. 이순신이 목숨을 내놓고 백성들을 지키는 노력을 다하자 백성들도 이순신을 돕기 시작한다. 일반인이 전쟁 중에 끼어든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다. 그런데도 백성들이 이순신이 타고 있던 대장선을 구하기 위해서 바다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두려움이었다. 목숨까지도 내어놓고 자신들을 지키고 있었던 이순신 장군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 한줄평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좋은 대답을 준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