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말한다

[영화] 중경삼림 (1994)_사랑의 유통기한

영화는설왕은 2023. 6. 11. 08:54

 

 

https://youtu.be/MhFU8vjKwCk

 

일단 이 영화는 전혀 촌스럽지 않다

남들이 명작 영화라고 부르는 영화를 볼 때 당황스러움이 몰려올 때가 있다. 어디가 왜 명작이라는 걸까? 이런 질문을 나도 모르게 할 때가 있다. 창피한 의문일 수 있다. 명작을 알아보는 눈이 나에게는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니까. 왕가위라는 명감독이 만들었으니까 명작이라는 걸까, 임청하와 양조위와 같은 정상급 배우가 나와서 명작이라는 걸까? 나는 왕가위 감독을 좋아하지도 않고 그의 작품을 제대로 본 것도 없다. 왕가위 감독이 한창 작품 활동을 할 때는 내가 너무 어렸고 세상을 좀 알게 된 지금은 1990년대 영화란 내게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영화다. 양조위나 임청하도 내가 좋아하는 배우는 아니다. 함께 나오는 왕페이나 금성무는 아예 모르는 사람이다. 요새 나오는 영화도 많은데 1990년대의 낯선 배경의 다소 촌스러운 연출과 화면에 관심을 기울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질감이 있으니까.

 

일단 영화는 전혀 촌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1994년의 홍콩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것도 세련된 영상으로 볼 수 있어서 타임머신을 타고 1994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뭐랄까. 이런 세련된 연출과 화면으로 보는 과거의 특정 지역을 볼 수 있는 영화를 본다는 것은 공간 여행과 시간 여행을 동시에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만약에 타임머신을 타고 500년 전의 조선 시대를 가 보면 어떨까? 촌스럽다고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촌스러운 것이 아니라 다르다고 느낄 것 같다. 조선 시대가 가지고 있는 멋이 있었을 테니까... 그 매력에 충분히 빠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찬가지로 1990년대의 홍콩은 좋은 느낌을 주었다. 부유하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눈을 호강시켜 주지는 못했지만 평범하고 자유롭게 살면서 행복하려고 노력하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었다. 

 

첫 번째 에피소드

영화는 두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와 두 번째 에피소드는 서로 이어지지 않는다. 겹치는 부분이 잠깐 나오기는 하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로 보는 것이 맞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금성무와 임청하다. 임청하는 금발 가발을 하고 나와서 나는 이 여자가 임청하인지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임청하 얼굴을 분명 본 적이 있을 텐데 너무 낯설고 왜 가발을 쓰고 나오는지 알 수 없어서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 임청하를 찾아보았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맞기는 맞는 것 같았다. 두 개의 에피소드 모두 실연당한 경찰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만우절에 이별통보를 받고 여자 친구의 말이 농담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경찰 하지무. 그리고 5월 1일에 유효기간이 파인애플 통조림을 산다. 5월 1일은 경찰 223의 생일이기도 하다. 한 달 동안 여자 친구가 좋아하는 통조림을 사모으면서 여자 친구를 기다린다. 결국 여자 친구는 돌아오지 않아서 한 달 동안 사놓은 통조림을 한꺼번에 먹어 치운다. 그리고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금발 가발을 쓴 미녀 임청하. 

 

 

두 번째 에피소드

두 번째 에피소드는 양조위와 왕페이가 주연으로 나온다. 경찰 663 양조위가 한 음식점에서 샐러드를 사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실 나는 양조위를 기다렸다. 네 명의 주인공 중 내가 그래도 좀 알고 있는 사람은 양조위였으므로. 양조위가 주인공이라는데 언제 나올지 한참을 기다렸다. 양조위가 등장하는 장면이 이 영화의 명장면 중에 하나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잘 몰랐다. 나중에 돌려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고 있는 페이는 경찰 663이 눈에 들어온다. 경찰 663에게는 여자 친구가 있었지만 실연을 당한다. 여자 친구를 위해서 날마다 샐러드를 샀던 경찰 663은 블랙커피를 사서 마신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음식점에 경찰 663의 여자 친구였던 스튜어디스가 찾아오고 편지를 남긴다.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음식점 사장은 그 편지를 뜯어서 보고 결국 음식점의 모든 직원이 그 편지를 돌려보고 마지막으로 페이에게까지 그 편지는 넘어온다. 그 편지는 이별 통보와 그의 아파트 열쇠를 담고 있었다. 

 

 

나는 두 번째가 더 좋았다

나는 첫 번째 에피소드보다는 두 번째 에피소드가 더 좋았다. 첫 번째는 너무 이질적이었고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다. 경찰과 마약밀매업자의 사랑이라... 가까스로 시작된다고 할지라도 결과가 너무 뻔하기 보이는 커플이라 더 큰 슬픔이 닥칠 것 같은 불안 때문에 말랑말랑한 마음을 유지할 수 없었다. 금성무는 매력이 있었다. 청년이 지닐 만한 아름다우면서도 수줍은 듯한 웃음을 얼굴에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청년다운 저돌적인 면, 실연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 달리기를 열심히 하는 모습도 패기 넘쳐 보였다. 그래도 두 번째 에피소드가 마음에 들었다. 금성무가 순수하고 아름다운 청년이라면 양조위는 진지하고 싱거운 듯한 아저씨 느낌이었다. 물론 결혼을 하지 않았으므로 아저씨라고 부른다면 자신은 좀 억울하겠지만 여하튼 그런 느낌이었다.

 

 

양조위의 매력에 빠져 볼까?

처음 나와서 대사를 치는 장면을 여러 번 돌려 보았다. 매력을 발견하려고. 그의 진지한 눈빛이 매력이 있다. 그리고 페이가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놓고 막 몸을 흔들면서 주문을 받는데 흔들림이 없다. 페이를 우습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진지하고 물어보고 진지하게 대답한다. 인간에 대한 존중이 눈과 말에서 드러난다고 해야 할까. 이런 지나친 진지함은 지나쳐서 질리는 것이 아니라 빠져들게 만든다. 방 안에 있는 모든 것들과 대화하는 경찰 663. 비누와도 대화하고 물이 떨어지는 행주도 위로한다. 집에 있을 때는 하얀 난닝구와 빤스를 입은 채로 돌아다니는데 대사는 모두 진지하다. 웃음끼가 없다. 그리고 양조위가 연기하는 경찰 663이 매력이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계속 기회를 준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지도 않는다. 전에 사귀던 스튜어디스 여자 친구가 남긴 편지를 일부로 읽지 않는다. 분명 거기에는 이별 메시지가 담겨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 편지를 읽는 순간 공식적인 이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그 편지를 계속 보관하고 있게만 한다. 나중에 페이와 연결이 되는 과정에서도 경찰 663의 매력이 발산된다. 마음에 드는 캐릭터다. 이런 사람과 사랑하면 참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눈빛도 빠져들게 하고 말도 진지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관대하고...

 

 

사랑의 유통기한

중경삼림에 나오는 명대사가 있다. 이것을 과연 명대사라고 해야 할지 난 잘 모르겠다. 경찰 223이 한 대사이다. "만약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나의 사랑은 만년으로 하고 싶다." 정말 유치한 대사이다. 왕가위 감독이라서 또한 금성무처럼 매력적인 남자가 하는 말이라서 들어줄 만한 대사가 아니었나 싶다. 나의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나는 딱 내가 죽을 때까지 만으로 하고 싶다.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사랑받으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내가 사랑하던 사람, 나를 사랑하던 사람도 내가 죽은 다음이라면 그 사랑의 힘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도 또 세상에도 좋지 않을까? 내 사랑의 유통기한이 있다면 나는 내가 죽을 때까지로 하고 싶다. 

 

 

중경삼림은 홍콩의 중국 반환을 얼마 남지 않는 시점에 나온 영화이므로 홍콩에 일어날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유통기한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자유로운 홍콩의 유통기한은 1997년 7월 1일까지였다. 안타깝다. 우리가 어린 시절 즐겨 보던 홍콩 영화는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그것은 홍콩의 중국 반환이 이루어졌기 때문일 텐데, 중경삼림은 자유로운 홍콩 문화의 마지막 불빛을 간직하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중경삼림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정치가 사람을 살려야 하는데 사람을 잡아먹고 있다.

 

이놈들아, 홍콩 영화 살려내라!